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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생각/자극

내 인생은 그럴 수 없어. 정체화 이야기

by 사이버여성 2021. 1. 14.

나는 고등학교 시절 연애를 하면서 내가 성소수자인 것을 깨달았다. 중학생 때 의문이 있기는 있었다. 주위 친구들과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왜 여자 연예인만 좋아하지? 그리고 왜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어하지 않지? 나 여자 좋아하나?' 스스로 기껏 떠올린 의문에 대한 답변은 '음....글쎄? 그냥 주변에 매력적인 남자가 없어서 그런거 아닌가? 그리고 나 말고도 여자연예인 좋아하는 여자애들 많은데 걔네들 다 성소수자일리 없지. 그럼 우리반 여자애들 80퍼센트가 성소수자? 아 웃겨 그러면 성소수자가 아니라 성다수자일 듯 킥킥' 이거였다.

 

더 지독한 건 '아...근데 만약에 내가 성소수자라면? 물론 성소수자들의 삶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게 내 인생인 건 좀 아닌 듯?그리고 만약에 그런 기질이 나에게 있다면 나는 참아낼 수 있을 거야. 모르긴 몰라도 성소수자로 살기 싫고, 그건 내 삶에 많은 위협이 될텐데 나는 그런 거를 감수할 필요 없고 욕망을 참아낼 거야.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지 모르지만, 어느 분야에선가는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내 발목을 붙잡을 것이고 나는 그것 때문에 내가 실패하기 싫으니까.' 동성애를 성공하는 사람이라면 참아낼 수 있는 변태적 욕구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저 생각까지 이르고 나서는 내가 성소수자인지 아닌지 다시 고민하지 않았다. (첫 연애 전까지) 무의식적으로 탐구를 거부했다. 왜 저런 생각을 가졌을까?

 

중학생이었던 나는 당시 메릴스트립의 열렬한 팬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녀가 남기는 옳은 말들에 과몰입하고 적극 실천하는 상태였다. 솔직히 사고를 거치지 않고 흡수했다. 뭐 대략 약자를 존중하고, 외모에 그만 집중하고,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걍 당연하고 뻔하게 맞는 말들? 사실 누가해도 할 수 있는 그런 말들이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하는 말이면 다가오는 의미가 훨씬 커지는 법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런 과몰입이 당시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본다. 외모에 신경쓰느라 시간을 보내는 걸 cool하지 못하다고 여기면서 바디셰이밍도 해소되었다. 실제로 그게 쿨하고 안쿨하고 문제는 아니겠지만, 반친구들이 악의 없이 외모 품평 좀 했다고 속상해하거나 마음에 담아두는 일이 없어져 갔다. 

 

외모 고민 같은 쓰잘데기 없는 짓 작작하시고요
남들과는 다른 점, 이상한 점 그게 바로 니 강점이얏^^그래 내가 이상한 레즈비언 아니었으면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주겠어~

 

메릴스트립 덕질이 이렇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아쉽게도 스스로가 성소수자인 걸 인정하는거까지는 다다르지 못했다. 당시 메릴은 요즘 PC감성에 부합하는 어지간한 좋은 말을 다했던 거 같다. 페미니즘적인 말도 했었고. 그 중에 당연히 LGBT에 대한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인터뷰도 있었다. 근데 길게 말은 안했거나, 내가 영어가 딸려서 이해를 못했을 것이다. 지금 다시 찾아보긴 귀찮다. 아무튼 나의 응용력 부족과 특유의 정상성 집착성향 덕분에 '성소수자들을 존중해야한다'는 개념은 받아드렸지만 '근데 나는 성소수자하면 안됨'이 된 것이다. 그러게 메릴이 화끈하게 "저는 레즈비언이고 이런 제 자신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요" 일케 나서줬으면 모든게 술술 풀렸을텐데 말이다. 농담이고, 막말로 진짜 메릴이 레즈비언일지라도 혹은 엘지비티 티큐아이에이+ 그 어떤 정체성이라고 밝혀도 와 메릴 짱 멋지다 '그런데 내 인생은 그럴 수 없어' 여기서 벗어날 수 없었을 거 같다. 메릴 스트립은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는 지존짱 배우고, 나는.... 그렇다고 할리우드에서 LGBT 차별 전혀 없고 하하호호하고 있다는 생각은 아닌데, 어쨌든 지금 대한민국보다는 비교도 안되게 낫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동성애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성소수자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LGBT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은 그럴 수 없어

휴, 이렇게 꿋꿋하게 정상성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던 나는 고등학교 때 여친이 생겨버린다. 뭐 저런 다짐 깊게 고민도 안하고 키스를 갈기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진짜 도라이네 미친놈. 여기서 체크해야할 점은 나는 이때까지도 스스로를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든 디나이얼들의 공통 사고 '나는 사람대 사람으로 얘랑 만나는 거지. 얘가 여자인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얘 말고 내 남은 인생에 여자친구는 없을 거야.' 이런 생각을 했다. 정체성이고 나발이고 생각하고 따질 필요 없을만큼 열심히 좋아했다. 그러다 이별 직전 여친과의 연애가 어느순간부터 허구한 날 싸우고 눈물의 화해를 반복하는 패턴이었기에 더욱 에너지가 부족해지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1년 쯤 넘게 만나다 헤어졌는데 그러고 나서도 대입 준비에 몰두하느라 정체성 생각은 뒷전이었다.

 

그렇게 정체화의 기회를 또 놓치고 살다가 대학 들어가면서 드디어 생각이란 걸 좀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성소수자는 맞다는 생각까지 해냈다. 와~~~!!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아휴 답답해 죽는 줄. 그럼 그 성소수자 중에 뭐지? 동성애자, 양성애자, 범성애자 어버버? 그러다 학교 퀴어 모임 팜플렛같은 걸 우연히 접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가입하였다. '와 나같은 사람들이 모이는구나. 대학은 이런 곳이구나!' 디나이얼 레즈에게는 참 신선한 쇼크였다. 그리고 모임 사람들이 트위터를 많이 하길래 나도 트위터를 시작했다.(소중한 트친들....왜 저 트위터 시작하는 거 안말리셨나요 휴) 그 때 나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고 스스로를 바이라고 하였다. 내가 아직 남자를 잘 몰라서 그렇지, 나에게 매력적인 남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솔직히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여지를 준 것이다. 마음 한켠에 '그래도 바이이면 어떻게든 가능성이 있다. 성소수 아닌 척 할 수 있다. 내 발목 아무도 못잡아 크하학' 뭐 이런게 개멍청한....생각을 했었다. 그렇지만 역시 숨길 수 없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인정을 하게 되었다. 나는 호모 플렉시블도 뭣도 아니구나. 나는 여자만 뒤지게 좋아하는 레즈비언이구나. 그렇게 나는 레즈비언이 됐다....

 

 

다시 돌아가서, 미래의 성공여부까지 들먹이며 동성애 욕구 정도는 참을 수 있을거라 장담했던 중학생에게 몇 자 갈기고 싶다.

 

그건 불행하게도 참을 수 없었어. 참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성소수자라는 사실은 "어느 분야에서만" 불이익을 받는 정도가 아니야. 차별과 고통에 익숙해지는 일들의 연속일 거야. 그래도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행복한 기억들도 많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가족한테 커밍아웃 되는 날이 올거야~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잠시 어렵고 슬픈 시간을 겪게 되는데...(더보기)

 

다음 글은 아빠한테 커밍아웃한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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