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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생각/경험정보

엄마랑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을 보다

by 사이버여성 2022. 4. 1.

너에게 가는 길 영화 포스터, 제작 연분홍치마, 출처 다음영화

지난해 12월 초 엄마와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을 보게 되었다.
어떻게 엄마와 이 영화를 같이 보게 되었을까? 우리 엄마가 특별히 퀴어 프렌들리한 사람도 아니고, 내가 여자를 만나는 여자라는 사실을 편하게 여기는 사람도 아닌데 참 신기한 일이다.

나는 개봉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미 영화를 보았다. 그때 엄마와 이 영화를 같이 보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빠와 보게 되더라도 기뻤겠지만, 뭔가 아빠는 거절할 가능성이 좀 더 높다고 느꼈다. 그리고 아빠가 거절을 안 하고 같이 보더라도... 이후 아빠의 반응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나는 몇 년 전, 성인이 되고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고, 그 반응은 안 좋았다. 나의 커밍아웃 이후 한동안 우리 가족은 서로를 투명인간처럼 대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니 다시 말을 하고 전처럼 지내게 되었다. 당시에는 너무 속상했지만, 어쨌든 집에서 내쫓기지도, 폭언을 듣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하ㅋㅋ아무튼 한녀는 정말 별 걸 다 감사해한다) 그러나, 다시는 내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너무 불편했고, 또 내가 조용히 있기만 하면 이 평화가 유지되는 걸 아니까. 응.... 그렇긴 한데 그냥 그 불편감, 싸해지는 분위기를 감수하고 내가 지껄이고 싶은 대로 종종 말하곤 했다. 별 말은 한 건 아니고,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을 엄마 아빠가 잊어버릴 때쯤 한 번씩 했다. 갑분싸가 되고 급정색하는 표정에, '아니 내가 지금 처음 커밍아웃 하나?' 싶어서 또 혼자 상처받았지만, 그래도 그냥 아득바득 한 번씩 분위기 망치면서까지 한 마디씩 했다. 아무래도 아빠보다는 엄마와 있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엄마 앞에서 더 많이 했다. 그래서 예전보다는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너무 서론이 길었는데, 평소에 뚫린 입이라고 나불거린 것치고는 막상 또 영화 같이 보러 가자고 직접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집에 같이 있는데 엄마한테 카톡을 보냈다.

생각보다 간단하게 수락을 해줘서, 신기했다. 그렇게 함께 영화를 보는데, 두 번째 관람이니 당연히 처음 관람했을 때보다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옆에 엄마가 있다는 게 의식되어서 중간중간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할까...궁금했다. 이미 첫 관람에서 눈물 몇 방울 흘렸음에도 또 눈물이 나오고, 그때 엄마를 힐끔 봤는데 엄마도 눈물을 흘리고 있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영화가 끝나고,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 하지 않다가 집 가는 길에 영화 보고 어땠는지를 한 마디도 안 할 거냐고 물었다. 엄마는 끄덕였지만, 계속되는 내 물음에 결국 답을 했는데 기껏 하는 말이 비비안님하고 예준님은 ebs 다큐(참고하세요 :https://youtu.be/9_9XFcaAjqg)에서 본 적이 있다고....ㅋㅋㅋㅋ그건 영화 본 감상이 아니라 그냥 정보, 사실이잖아. 그렇게 당일에는 넘어갔지만, 블로그에 이 경험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하니까, 엄마의 감상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최근에 또 물어봤다. 되게 집요한 사람이 된 나 ㄷㄷ.
이번에는 나름 유의미한 말을 건질 수 있었다.

"모두가 너에게 갈 수는 없는 거야. 그냥 좀 멀찍이 평행하게 갈 수도 있어. 그래도 내가 너한테 오라고는 안하잖아(웃음) " 엄마의 <너에게 가는 길> 한 줄 평

응 그렇네.....너무 깔끔한 평이라 더 할 말이 없어졌다.
같이 영화를 보러가준 엄마에게 다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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